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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Vol.84 바람에 날리는 진눈깨비와 재의 날들

No: 29

작성자: 경영기획팀

작성일: 2023-12-29 17:33:12

조회수: 127

본 내용은 재단 기관지 삶과 문화 겨울호에 게재됐습니다.
삶과 문화 겨울호(제84호)는 재단 홈페이지, 제주문화포털 제주인놀다 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제주문화예술재단, 예술공간 이아, 산지천갤러리 방문 시 무료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

" 바람에 날리는 진눈깨비와 재의 날들 "
글 조수진(<제주투데이> 기자)

결국 ‘좋은 작품’만이 답

“but the equation doesn't change which is you shoot the film the best way possible you present it in the absolute best way possible.”
(하지만 공식은 변하지 않습니다. 영화를 가능한 한 최선의 방법으로 만들어, 가능한 한 최선의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 7월 14일, 미국의 영화 팟캐스트 「ReelBlend」에 출연한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은
“이제 관객들은 ‘덩케르크’, ‘다크 나이트’ 같은 당신 영화를 아이패드나 심지어 스마트워치로 볼 수 있다.”는
진행자의 다소 짓궂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제주에서 연극이 주목받지 못한다는 평가를 벗어나기 위한 길은 어쩌면 간단하다.
‘좋은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다. 배우의 작은 표정 변화와 숨결에도 눈을 뗄 수 없고,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며,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에 전율을 느끼는 경험. 공연이 끝나도 무대 위 무형의 ‘서사의 탑’ 이 주는 무게감을 느끼며
여운을 곱씹는 경험. 작품·극단·출연진·제작진의 이름을 오랫동안 기억하 는 경험.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는
그런 좋은 작품들을 만나는 반갑고 기쁜 시간이었다.

좋은 연극들을 제주도민들에게 소개하는 기회가 22년 만에 찾아온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제주 연극계는 냉정한 자기 평가와 함께, 녹록치 않은 여건에서도 더 나은 작품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행정은 연극 예술이 가진 힘, 특히 제주어 보전에 있어 다른 예술보다 탁 월한 능력을 가진 장점에 주목해 기회를 제공했으면 한다.

이번 연극제를 계기로 제주에 뿌려진 작은 씨앗이, 제주 연극인들과 예술 행정이란 양분을 바탕으로
싹을 틔워 언젠가 굵은 가지로 뻗어나가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매캐하다. 허호준의 책 『4·3, 19470301-19540921』을 읽는 내내 나를 괴롭히던 감각이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종종 콧속을 찌른다. 그럴 때마다 반사적으로 미간이 찌푸려지며
‘그날 그곳’의 장면이 떠오른다. 냄새는 힘이 세다. 특히 불에 탄 냄새는 좀처럼 지워지 지 않는다.
어느 ‘진눈깨비와 재의 날’로 나를 끌어당긴다. 아니다. 이 책을 읽은 후 그날을 떠날 수 없게 됐다.
아무리 닦아내도 지워지지 않는 탄내와 그을음이 내 의식 깊은 곳에 상처처럼 새겨졌다.
1949년 1월17일. 나는 그날을 매캐한 냄새로 기억하게 됐다. 조천면(지금의 조천읍)
북촌에서 일어난 집단학살을 중심으로 서술한 9장 ‘그날 그곳’에 나는 오래도록 머물렀다.

“군인들이 집마다 불을 지르고 있었다. 초가지붕에 붙은 불들이 세찬 바람을 타고 미친 듯이 번지고 있었다.
군인들의 얼굴이 불길에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건 또 있었다. 진눈깨비였다.
흰 눈과 붉은 불길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초가를 태우는 매캐 한 냄새가 밀려왔다. 모두가 움츠러들었다.
집을 태운 검은 재와 흰 재가 뒤섞여 바람을 타고 날아다녔다.”(243쪽)

군인들이 하루에 북촌리 주민 300여명을 학살하고 집을 불태운 만행.
4·3 기간 발생한 제주도민 피해 사건 중 규모면에서도, 잔혹성면에서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만행이라는 것을 현기 영의 소설 「순이삼촌」이나 진상조사보고서의 기록 등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까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언젠가 영화관이나 TV에서 봤던 전형적인 학살 장면이었다.
총 검을 든 군인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쏘고 찌르는. 1949년 1월17일의 북촌리는 텍스트와 막연한 이미지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저자는 북촌리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날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내 눈 속으로 진눈깨비와 재가 날아들었다. 콧속으로 매캐한 연기가 들어와 숨을 참았다.
그날의 참혹한 공간에 던져져 광경을 지켜봤다.
그곳에서 나는 죽은 이의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 하나 털어내 줄 수조차 없다.

이 책은 4·3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구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저자는 “4·3이 하루 이틀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일이라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곱씹어 보고,
나아가 기억해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기억’이라는 단어는 4·3은 물론이고,
대규모 희생자가 발생한 참사나 과거사를 언급할 때 매번 등장 한다. 때론 막연하게 느껴지는 이 단어를 볼 때마다
‘무엇을?’이라는 의문이 생긴다. 끔찍한 죽음을? 야만적인 폭력을?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슬픔을?
비극을 막지 못한 우리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이 질문에 저자는 각 장에서 서로 다른 모습의 4·3으로 답한다.
이는 2023년 현재 한국 사회 의 4·3 현주소이기도 하다.

“19세기 말부터 전략적 요충지로서 열강들의 관심을 받아온 제주도는 냉전 체제 형성기에도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 당시 서울에 있던 미국의 관리들과 외신들은 이미 미-소 대결의 한 축으로 제주도를 바라보고 있었다.”(148쪽)

“해방 당시 제주 섬 사람들이 얼마나 굶주렸습니까? 제주도에 먹을 양식이 없었습니다.
미 군정이 식량을 줘야 살아갈 텐데 양과자를 배급하는 겁니다.
그래서 초코레토를 주지 말고 양식을 배급하라고 호소한 거지요.”(194쪽, 양과자 반대운동 주역 현정선의 말)

“미군을 해방군으로 봤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하다. 우리를 해방해준다고 했는데
그런 움직임이 없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차차 대립하게 됐다.”(200쪽, 현정선의 말)

“‘33만 전 도민이 총칼 앞에 제 가슴을 내어밀었다는 데에서 문제는 커진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맨주먹을 쥔 제주 사람들이 왜 총칼을 상대하고 있는지 그 원인을 찾고 이를 해결해야 했으나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155쪽)

“명경 같은 하늘님아. 우리가 무슨 죄를 지어수과. 말이나 허여줍서.
식게 나민 떡반 태와주 고(…). 이렇게 평화롭게 살던 우리안티 이게 무슨 일이우꽈?”(251쪽)

“해방된 조국, 해방된 고향의 혼란은 이들로 하여금 또다시 대한해협을 건너도록 부채질했다.
미군정의 단속을 피해 실업과 굶주림에 지친 제주 섬 사람들은
거친 바다와 싸울지언정 바다를 건너 제주를 떠나는 쪽을 택했다.”(172쪽)

“친구들이 총살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이창순은 1949년 서울로 떠났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장례식에 가보지도 못했다.
종손임에도 불구하고 참석할 수 없었다. 두고 두고 한으로 남았다. 할머니의 유언은 더 사무쳤다. ‘죽어도 절대 돌아오지 말아라.’”(177쪽)

“4·3이 끝나고 나니 사는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일한 딸로 나중에
저승 가면 아버지한테 ‘불명예를 씻고 왔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107쪽, 2020년 12월22일 수형 희생자 재심 재판장에서 유족 강방자의 말)

4·3은 항일운동가이자 마을에서 존경받는 어른들이 했던 저항이었다.
미국에겐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지배 우위를 점하기 위해 군사적 요충지
‘제주 섬’을 장악하려는 과정이자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던 ‘작전’이었다.
제주지역 청년학생들이 “드롭프스 대신 쌀을 달라”고 외쳤던 ‘양과 자 수입 반대운동’이었다.
해방군인줄 알았던 미군의 탈바꿈이었다. “죄 없는 우리한테 왜 이러느냐”며 하늘님을 탓하던 통곡이었다.
동상 걸린 발에 고름이 터져도 죽음이라는 공포 때문에 추위 조차 느끼지 못했던 겨울이었다.
동족끼리 대립하던 우리 민족의 비극이었다. 학살터로 끌려가던 아버지가 “옷을 해입으라”며 건네주던 두루마기였다.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는 수많은 죽음들이었다.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남편이었다.
“죽어도 절대 (제주에) 돌아오지 말라” 던 할머니의 유언이었다.
기적처럼 살아남은 날들을 죗값을 치르는 마음으로 옥죄었던 족쇄였다.
평생을 도망쳤지만 매순간 벗어날 수 없었던 ‘시간의 고문’이었다. 희생자를 정함에 있어서도 존재하는 차별이었다.
남북통일을 바라는 마음이었다. “폭력은 배제해야 한다”는 정신이었다.
수 백, 수천만명의 관광객이 걷는 올레길 위에 보이지 않는 그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