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Vol.85 참혹한 과거, 기억하는 현재, 이어지는 미래
- No
- 28
- 작성자
- 경영기획실
- 작성일
- 2023-12-29 16:53:07
- 조회수
- 89
본 내용은 재단 기관지 삶과 문화 겨울호에 게재됐습니다.
삶과 문화 겨울호(제84호)는 재단 홈페이지, 제주문화포털 제주인놀다 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제주문화예술재단, 예술공간 이아, 산지천갤러리 방문 시 무료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
" 참혹한 과거, 기억하는 현재, 이어지는 미래 "
글 한영인(문학평론가)
1
현기영이 『창작과비평』에 중편 「순이 삼촌」을 발표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4·3사건의 비극을 알리기 시작한건 1978년이었다.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던 국가 폭력의 민낯을 전격적으로 소설화한 이 작품으로 인해 작가는 이듬해 보안사에 끌려가 혹독한 고초를 겪어야 했고
작품은 14년 동안 판매금지 도서로 묶여 잠들어야 했지만 현기영의 펜은 꺾이지 않았다. 알다시피 이후 현기영의 문학적 행로는 4·3 사건을 비롯해
제주의 수난과 항쟁의 역사를 증언하는데 바쳐졌다. 1898년에 발생한 ‘방성칠의 난’과 1901년의 ‘신축제주항쟁(이재수의 난)’을 생생하게 되살린
『변 방의 우짖는 새』(1993)와 일제 강점기에 벌어진 제주해녀항일운동을 다룬 『바람타는 섬』(1989)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올해 여든세 살의 노작가는 세 권짜리 장편소설 『제주도우다』를 발표했다. 1978년 이후 여러 차례 4·3 사건을 다룬 작품을 썼지만
4·3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장편소설은 『제주도우다』가 처음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 험난한 작업을 마주하게 했을까.
그건 「순이 삼촌」으로부터 5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에게 4·3 사건은 여전히 납득할 수도 그 전모를 한 눈에 파악할 수도 없는
거대한 역사의 미궁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4·3 사건의 아포리아는 무엇보다 그 사건의 잔혹함과 비참함의 압도적인 광경에서 비롯하지만
그 잔혹함과 비참함은 다음과 같은 질문 앞에 우리를 계속 머물게 한다. “4·3의 비극은 왜 일어났는가?”
4·3 사건의 원인과 전개에 관해서라면 이미 상당 부분 축적된 연구 성과가 존재한다. 사건의 전모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4·3 평화기념관을 방문해 그곳의 전시 시설을 돌아보면 대략적으로 4·3 사건의 발생 원인과 전개 과정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우리가 4·3 사건의 비극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랬다면 현기영이 노작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세 권짜리
장편소설을 통해 4·3이라는 아포리아를 대면할리 없었을 것이다. 그는 출간 이후 제주문학관에서 열린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4·3의 희생자가 3만명이라면 문학 하는 사람에게 4·3은 3만개의 사건입니다.” 현기영은 역사 학자나 정치학자가 아닌 문학가의 입장에서 4·3 사건을 마주한다.
그래서 그에게 중요한것은 지정학적이고 정치적인 구조와 요인은 물론이고 그와 자신의 삶과 죽음을 맞물려 놓았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진실이다.
그가 여전히 4·3 사건을 무언가 풀리지 않은 거대한 미궁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거대한 죽음의 개별성을 우리가 여전히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
『제주도우다』는 작가가 밝히고 있듯 4·3 사건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본격적인 소설적 탐구다.
소설적 탐구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물을 어떻게 설정하고 배치하느냐에 따라 그 폭과 깊이가 달라진다.
소설을 열자마자 독자가 만나게 되는 인물은 서른두 살 청년 임창근이다. 제주 출신 아내 안영미와 함께
다큐멘터리 필름을 제작하는 일을 하는 임창근은 영미 할아버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장편 다큐를 제작하려는 기획을 품고 있다.
하지만 부부의 계획은 순항하지 못한다. 아무리 손녀가 졸라도 할아버지의 입이 쉽게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입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여 히 그를 지배하고 있는 끔찍한 공포다. 하지만 손녀 부부의 진정성 있는 요청에
마침내 할아버지는 조금씩 입을 떼기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안창세.
이 소설은 소년 안창세가 겪은 4·3 이야기를 그의 손녀 앞에서 풀어내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오래전에 ‘새콧알’이라고 불린, 지금의 조천포구쪽이다. 그런데 안창세는 손녀에게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신화처럼 내려오는 옛 조상 안씨 선주의 일화를 풀어놓는다. 가뭄에 굶주린 제주 사람들을 도와 쌀을 구하기 위해 배를 띄웠던
안씨 선주의 이야기는 설문대 할망 전설로 이어진다. 설문대 할망은 제주 땅을 만든 후 섬 백성들에게 옷 한 벌을 지어주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거대한 설문대 할망의 몸에 맞는 옷을 지으려면 명주 백 통이 필요했는데
섬 백성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모을 수 있었던 건 아흔 아홉통 뿐. 그래서 제주는 육지와 연결되지 못하고 끝내 섬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소설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 전설은 조선 후기 출륙금지령으로 이어지면서 제주가 오래 전부터 육지로부터 고립된 ‘물 위의 감옥’이었음을 드러낸다.
어쩌면 육지로부터 배제되고 고립되었던 섬의 운명이 마치 4·3 사건의 잔혹과비참을 예고하고 있기라도 한 듯이.
조천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또 있다. 조천은 4·3 사건 당시 커다란 피해를 입은 곳인 동시에 일제 강점기에는
여러 항일 투사를 배출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자인 김명식을 비롯해 고순흠, 안세훈등 항일독립투쟁에 나선 인물들이 조천 출신이다.
조천포가 공간적 배경이라면 본격적인 서사의 시간은 일제 강점기로부터 출발한다.
4·3 사건은 그 기원과 배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전으로 시야를 넓혀야 하기 때문이다.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는 전쟁의 포화에 휩쓸려 들어가게 된다.
소설은 당시 일제의 총력전 체제에서 민초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수탈의 역사를 섬세하게 고증한다.
“무명과 삼베를 공출해갔고, 군용 통조림을 만든다고 소와 돼지를 끌어가고 소라와 보말(보말고둥)까지 쓸어갔다.
물론 면화도 공출 대상이었고, 폭약을 만든다고 감태 공출, 휘발유 대신에 비행기 연로로 쓴다고 고구마와 송진 공출을 강요했고...
”(78면) 전쟁에서 패전의 기색이 짙어 지자 일본군은 제주를 최후 거점으로 삼아 결사 항전에 돌입할 태세를 갖추게 된다.
오름 곳곳을 파헤쳐 진지동굴을 건설하고 비행장을 닦았다. 그 과정에서 몸이 약한 사람은 죽기도 했는데 그들은 죽더라도
고향 땅에 묻힐 수 있기에 남양군도나 규슈 탄광으로 끌려가지 않은걸 차라리 다행으로 생각했다.
안창세가 열세 살이 되던 1945년 드디어 조선은 독립을 얻게 된다. 이후 소설은 해방 공간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다는
흥분과 기쁨에 들뜬 사람들의 모습을 힘차게 조명한다. 이 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소년의 시점에서 바라본 청년의 꿈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정대길과 부대림을 비롯해 장영발, 문상옥, 박털보등의 청년들이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백가쟁명식 토론을 이어가는 장면을
소설은 희곡 형식으로 담아내는데 그와 같은 형식은 그 당시를 채색하던 흥분의 열도를 몰입감 있게 형상화하는 효과를 지닌다.
그렇지만 해방 이후 제주도의 앞날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섬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데 반해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흉작이 이어져 식량난이 심각해졌다.
미군정은 민생고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을 다잡기는 커녕 친일 경력이 있는 군경 인사 및 공무원을 재발탁함으로써
도민들이 품은 새로운 꿈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거세게 저항했고 1947년 3.1절에 열린 대규모 군중 집회에서
경찰은 여섯명의 생명을 앗아감으로써 긴 항쟁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3
이 소설이 가장 공들인 부분은 그 긴 항쟁을 핍진하게 서술하는 대목이다. 이는 작가가 4·3을 육지경찰, 서북청년단, 미군정등의
외세의 지배에 맞선 제주도 공동체의 결기 어린 항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창세 역시 입산해서
연락책 역할을 맡으면서 항쟁에 참여한다. 하지만 이제 막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마치 본보기를 보이듯 섬멸 작전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입산자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은 물론이고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한다.
그 처참한 최후를 모두 지켜본 안창세는 홀로 산을 내려와 귀순한다. 그때 안창세를 발견한 서청 대대 최영호 하사는
안창세로 하여금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비밀스런 방도를 일러준다.
“그리구 취조할 때 취조관이 ‘너 만세 부를 줄 알디? 만세 한번 불러보라’ 할기야. 그럼 어카간, 응? 만세 한번 불러보라우.”
창세가 우물쭈물하다가 8.15 해방 때 불렀던 대로 “조선 독립 만세”하고 중얼거렸다. “야, 이보라. 너 정신 나갔네? 조선 독립 만세?
그러면 큰일 나. 당장 총살, 총살이야! 앞서 청년 몇이 ‘조선 독립 만세!’ 했다가,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발쎄 넉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조선 독립 만세’냐, 사상이 불온하다 하면서 총살했어. 이젠 ‘조선 독립 만세’가 아니라
‘대한민국 만세’야. 알았디? 명심하라우. 거럼 연습 삼아 ‘대한민국 만세!’ 한번 불러보라.” “대한민국 만세!” (3권, 343면.)
1945년, 뜨거운 기쁨으로 모두가 함께 외쳤던 ‘조선 독립 만세’의 기억은 이렇게 불온한 금기에 싸인 채 봉인되고 만다.
그 자리를 새롭게 채우는 것은 ‘대한민국 만세’이다. ‘조선 독립 만세’에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새롭게 만들어 갈 나라에 대한
희망과 기쁨이 담겨 있지만 ‘대한민국 만세’에는 살육의 공포 앞에 처참하게 망가져버린, 너덜거리는 육신과 정신의 파편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4·3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발생시킨 ‘본원적 폭력’이다.
자본이 피와 오물을 내뿜으며 출현했던 것처럼 ‘대한민국’ 역시 학살당한 제주도민이 내뿜은 피와 오물을 딛고 건국된 것이다.
4·3은 대한민국이 아무리 부인해도 끝내 떨쳐 낼 수 없는 ‘출생의 비밀’과 같다.
어쩌면 현기영의 소설 쓰기를 이끌어 온 동력은 그 비밀을 폭로하려는 진실에 의지일지도 모른다. 『제주도우다』가
일종의 액자 형식을 띠고 있는 것도 그 점과 관련해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안창세의 이야기를 듣는 손녀 영미와
그녀의 남편 창근은 단지 창세의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듣는 청자에 머물지 않고 그 이야기를 새로운 작업으로
탄생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과거의 참혹한 과거가 이를 기억하려는 현재의 열망과 만나
공식 기억의 이면에 가려진 시대의 아픔과 가능성을 복원하는 새로운 미래로 이어지는 구도가
그 액자 안에 희망처럼 담겨 있는 것이다. 현기영의 4·3 이야기는 이로써 하나의 거대한 매듭을 완성했지만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아직 우리 눈앞에 있다
삶과 문화 겨울호(제84호)는 재단 홈페이지, 제주문화포털 제주인놀다 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제주문화예술재단, 예술공간 이아, 산지천갤러리 방문 시 무료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
" 참혹한 과거, 기억하는 현재, 이어지는 미래 "
글 한영인(문학평론가)
1
현기영이 『창작과비평』에 중편 「순이 삼촌」을 발표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4·3사건의 비극을 알리기 시작한건 1978년이었다.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던 국가 폭력의 민낯을 전격적으로 소설화한 이 작품으로 인해 작가는 이듬해 보안사에 끌려가 혹독한 고초를 겪어야 했고
작품은 14년 동안 판매금지 도서로 묶여 잠들어야 했지만 현기영의 펜은 꺾이지 않았다. 알다시피 이후 현기영의 문학적 행로는 4·3 사건을 비롯해
제주의 수난과 항쟁의 역사를 증언하는데 바쳐졌다. 1898년에 발생한 ‘방성칠의 난’과 1901년의 ‘신축제주항쟁(이재수의 난)’을 생생하게 되살린
『변 방의 우짖는 새』(1993)와 일제 강점기에 벌어진 제주해녀항일운동을 다룬 『바람타는 섬』(1989)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올해 여든세 살의 노작가는 세 권짜리 장편소설 『제주도우다』를 발표했다. 1978년 이후 여러 차례 4·3 사건을 다룬 작품을 썼지만
4·3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장편소설은 『제주도우다』가 처음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 험난한 작업을 마주하게 했을까.
그건 「순이 삼촌」으로부터 5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에게 4·3 사건은 여전히 납득할 수도 그 전모를 한 눈에 파악할 수도 없는
거대한 역사의 미궁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4·3 사건의 아포리아는 무엇보다 그 사건의 잔혹함과 비참함의 압도적인 광경에서 비롯하지만
그 잔혹함과 비참함은 다음과 같은 질문 앞에 우리를 계속 머물게 한다. “4·3의 비극은 왜 일어났는가?”
4·3 사건의 원인과 전개에 관해서라면 이미 상당 부분 축적된 연구 성과가 존재한다. 사건의 전모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4·3 평화기념관을 방문해 그곳의 전시 시설을 돌아보면 대략적으로 4·3 사건의 발생 원인과 전개 과정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우리가 4·3 사건의 비극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랬다면 현기영이 노작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세 권짜리
장편소설을 통해 4·3이라는 아포리아를 대면할리 없었을 것이다. 그는 출간 이후 제주문학관에서 열린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4·3의 희생자가 3만명이라면 문학 하는 사람에게 4·3은 3만개의 사건입니다.” 현기영은 역사 학자나 정치학자가 아닌 문학가의 입장에서 4·3 사건을 마주한다.
그래서 그에게 중요한것은 지정학적이고 정치적인 구조와 요인은 물론이고 그와 자신의 삶과 죽음을 맞물려 놓았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진실이다.
그가 여전히 4·3 사건을 무언가 풀리지 않은 거대한 미궁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거대한 죽음의 개별성을 우리가 여전히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
『제주도우다』는 작가가 밝히고 있듯 4·3 사건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본격적인 소설적 탐구다.
소설적 탐구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물을 어떻게 설정하고 배치하느냐에 따라 그 폭과 깊이가 달라진다.
소설을 열자마자 독자가 만나게 되는 인물은 서른두 살 청년 임창근이다. 제주 출신 아내 안영미와 함께
다큐멘터리 필름을 제작하는 일을 하는 임창근은 영미 할아버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장편 다큐를 제작하려는 기획을 품고 있다.
하지만 부부의 계획은 순항하지 못한다. 아무리 손녀가 졸라도 할아버지의 입이 쉽게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입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여 히 그를 지배하고 있는 끔찍한 공포다. 하지만 손녀 부부의 진정성 있는 요청에
마침내 할아버지는 조금씩 입을 떼기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안창세.
이 소설은 소년 안창세가 겪은 4·3 이야기를 그의 손녀 앞에서 풀어내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오래전에 ‘새콧알’이라고 불린, 지금의 조천포구쪽이다. 그런데 안창세는 손녀에게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신화처럼 내려오는 옛 조상 안씨 선주의 일화를 풀어놓는다. 가뭄에 굶주린 제주 사람들을 도와 쌀을 구하기 위해 배를 띄웠던
안씨 선주의 이야기는 설문대 할망 전설로 이어진다. 설문대 할망은 제주 땅을 만든 후 섬 백성들에게 옷 한 벌을 지어주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거대한 설문대 할망의 몸에 맞는 옷을 지으려면 명주 백 통이 필요했는데
섬 백성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모을 수 있었던 건 아흔 아홉통 뿐. 그래서 제주는 육지와 연결되지 못하고 끝내 섬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소설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 전설은 조선 후기 출륙금지령으로 이어지면서 제주가 오래 전부터 육지로부터 고립된 ‘물 위의 감옥’이었음을 드러낸다.
어쩌면 육지로부터 배제되고 고립되었던 섬의 운명이 마치 4·3 사건의 잔혹과비참을 예고하고 있기라도 한 듯이.
조천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또 있다. 조천은 4·3 사건 당시 커다란 피해를 입은 곳인 동시에 일제 강점기에는
여러 항일 투사를 배출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자인 김명식을 비롯해 고순흠, 안세훈등 항일독립투쟁에 나선 인물들이 조천 출신이다.
조천포가 공간적 배경이라면 본격적인 서사의 시간은 일제 강점기로부터 출발한다.
4·3 사건은 그 기원과 배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전으로 시야를 넓혀야 하기 때문이다.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는 전쟁의 포화에 휩쓸려 들어가게 된다.
소설은 당시 일제의 총력전 체제에서 민초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수탈의 역사를 섬세하게 고증한다.
“무명과 삼베를 공출해갔고, 군용 통조림을 만든다고 소와 돼지를 끌어가고 소라와 보말(보말고둥)까지 쓸어갔다.
물론 면화도 공출 대상이었고, 폭약을 만든다고 감태 공출, 휘발유 대신에 비행기 연로로 쓴다고 고구마와 송진 공출을 강요했고...
”(78면) 전쟁에서 패전의 기색이 짙어 지자 일본군은 제주를 최후 거점으로 삼아 결사 항전에 돌입할 태세를 갖추게 된다.
오름 곳곳을 파헤쳐 진지동굴을 건설하고 비행장을 닦았다. 그 과정에서 몸이 약한 사람은 죽기도 했는데 그들은 죽더라도
고향 땅에 묻힐 수 있기에 남양군도나 규슈 탄광으로 끌려가지 않은걸 차라리 다행으로 생각했다.
안창세가 열세 살이 되던 1945년 드디어 조선은 독립을 얻게 된다. 이후 소설은 해방 공간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다는
흥분과 기쁨에 들뜬 사람들의 모습을 힘차게 조명한다. 이 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소년의 시점에서 바라본 청년의 꿈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정대길과 부대림을 비롯해 장영발, 문상옥, 박털보등의 청년들이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백가쟁명식 토론을 이어가는 장면을
소설은 희곡 형식으로 담아내는데 그와 같은 형식은 그 당시를 채색하던 흥분의 열도를 몰입감 있게 형상화하는 효과를 지닌다.
그렇지만 해방 이후 제주도의 앞날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섬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데 반해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흉작이 이어져 식량난이 심각해졌다.
미군정은 민생고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을 다잡기는 커녕 친일 경력이 있는 군경 인사 및 공무원을 재발탁함으로써
도민들이 품은 새로운 꿈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거세게 저항했고 1947년 3.1절에 열린 대규모 군중 집회에서
경찰은 여섯명의 생명을 앗아감으로써 긴 항쟁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3
이 소설이 가장 공들인 부분은 그 긴 항쟁을 핍진하게 서술하는 대목이다. 이는 작가가 4·3을 육지경찰, 서북청년단, 미군정등의
외세의 지배에 맞선 제주도 공동체의 결기 어린 항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창세 역시 입산해서
연락책 역할을 맡으면서 항쟁에 참여한다. 하지만 이제 막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마치 본보기를 보이듯 섬멸 작전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입산자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은 물론이고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한다.
그 처참한 최후를 모두 지켜본 안창세는 홀로 산을 내려와 귀순한다. 그때 안창세를 발견한 서청 대대 최영호 하사는
안창세로 하여금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비밀스런 방도를 일러준다.
“그리구 취조할 때 취조관이 ‘너 만세 부를 줄 알디? 만세 한번 불러보라’ 할기야. 그럼 어카간, 응? 만세 한번 불러보라우.”
창세가 우물쭈물하다가 8.15 해방 때 불렀던 대로 “조선 독립 만세”하고 중얼거렸다. “야, 이보라. 너 정신 나갔네? 조선 독립 만세?
그러면 큰일 나. 당장 총살, 총살이야! 앞서 청년 몇이 ‘조선 독립 만세!’ 했다가,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발쎄 넉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조선 독립 만세’냐, 사상이 불온하다 하면서 총살했어. 이젠 ‘조선 독립 만세’가 아니라
‘대한민국 만세’야. 알았디? 명심하라우. 거럼 연습 삼아 ‘대한민국 만세!’ 한번 불러보라.” “대한민국 만세!” (3권, 343면.)
1945년, 뜨거운 기쁨으로 모두가 함께 외쳤던 ‘조선 독립 만세’의 기억은 이렇게 불온한 금기에 싸인 채 봉인되고 만다.
그 자리를 새롭게 채우는 것은 ‘대한민국 만세’이다. ‘조선 독립 만세’에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새롭게 만들어 갈 나라에 대한
희망과 기쁨이 담겨 있지만 ‘대한민국 만세’에는 살육의 공포 앞에 처참하게 망가져버린, 너덜거리는 육신과 정신의 파편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4·3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발생시킨 ‘본원적 폭력’이다.
자본이 피와 오물을 내뿜으며 출현했던 것처럼 ‘대한민국’ 역시 학살당한 제주도민이 내뿜은 피와 오물을 딛고 건국된 것이다.
4·3은 대한민국이 아무리 부인해도 끝내 떨쳐 낼 수 없는 ‘출생의 비밀’과 같다.
어쩌면 현기영의 소설 쓰기를 이끌어 온 동력은 그 비밀을 폭로하려는 진실에 의지일지도 모른다. 『제주도우다』가
일종의 액자 형식을 띠고 있는 것도 그 점과 관련해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안창세의 이야기를 듣는 손녀 영미와
그녀의 남편 창근은 단지 창세의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듣는 청자에 머물지 않고 그 이야기를 새로운 작업으로
탄생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과거의 참혹한 과거가 이를 기억하려는 현재의 열망과 만나
공식 기억의 이면에 가려진 시대의 아픔과 가능성을 복원하는 새로운 미래로 이어지는 구도가
그 액자 안에 희망처럼 담겨 있는 것이다. 현기영의 4·3 이야기는 이로써 하나의 거대한 매듭을 완성했지만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아직 우리 눈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