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Vol.85 장소의 상실과 예술의 기억
- No
- 21
- 작성자
- 경영기획실
- 작성일
- 2023-12-29 16:49:07
- 조회수
- 79
본 내용은 재단 기관지 삶과 문화 겨울호에 게재됐습니다.
삶과 문화 겨울호(제84호)는 재단 홈페이지, 제주문화포털 제주인놀다 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제주문화예술재단, 예술공간 이아, 산지천갤러리 방문 시 무료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
" 장소의 상실과 예술의 기억 "
글 김동현(문학평론가)
장소, 기억의 대지
장소는 기억이다. 사람은 장소에 깃들고 장소는 몸에 스민다. 시간의 지층에 새겨진 무늬가 기억 이라면 장소는 그 무늬를 품는다.
그러기에 장소가 사라지면 기억이 사라지고, 사람의 자리가 허물 어진다. 그것은 생성을 잃어버린 폐허다. 삶을 품지 못하는 불모의 대지다.
장소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장소는 인간의 삶이 탄생하는 토대이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향기를 맡으며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보여주듯 기억은 장소를 통해 공유된다.
문학이 시간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때 장소성은 중요한 테마로 등장하곤 한다.
현기영의 『제주도우다』가 제주 4·3항쟁의 기억을 말할 때 조천의 장소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나
김숨의『잃어버린 사람』이 부산 영도를 배경으로 해방기의 하루를 재현하고 있는 것은
장소성이 기억의 문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술은 장소의 필경사를 스스로 자처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문학, 나아가 예술이 장소성을 바탕으로 시간을 사유할 때 그것은 상실에 대해 예민한 촉수를 들이댈 수밖에 없다.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생태학자 아르투로 에스코바르가 근대성과 식민성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신자유주의 이후의 세계화를 유럽 중심이라는 로컬의 세계화로 규정하면서 세계화가 보편의 이름으로 장소를 지워가는
식민화의 과정이라고 지적한 것은 그런 점에서 주목 할 만하다. 제주 4·3항쟁의 문제에 천착해오던
현기영이 1992년 ‘토착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 혀간다’(「목마른 신들」)라고 말한 것을 떠올려보자.
현기영의 이런 진술은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었다. 이즈음 제주는 제주도개발특별법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 다.
연일 특별법 반대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탑동 매립 반대 운동 등 국가와 자본에 의한 개발의 폭력성이
제주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높아지던 시기였다. 그야말로 “토착의 뿌리”가 위태로웠던 시기,
그것을 현기영은 반자본, 반개발이 아니라 제주 정체성의 위기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체성이 주체에 대한 자기 인식이라고 할 때
그것은 기억의 문제와 필연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자본에 의한 개발과 그에 따른 지리적 재편성을 현기영은 초원지대가 죽음의 카페트가 깔린 골프장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은 초원의 기억이 자본의 기억으로 변질되는 장소성의 상실에 대한 예리한 지적이기도 했다.
이처럼 장소성의 상실은 아스팔트로 상징되는 개발주의 에의한 기억의 파괴이자, 지역의 시간을 서울의 시간으로 뒤덮는 망각의 은폐로 인식 되었다.
장소성의 상실을 하나의 위기로 받아들였던 것은 현기영뿐만 아니었다. 1988년 발표된 김석희의 『땅울림』 역시 이를 순결성의 훼손으로 인식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제주에서는 외지인 토지 소유 문제가 대두되었고, 김석희는 소설 속에서 그것을
“외지인의 침식을 피해 제주도적인 순결로 남아있는게 과연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이러한 문학적 사유는 80년대 제주민중 예술운동의 선두자였던 극단 수눌음이 창단 작품으로 ‘땅풀이’를 공연한 때로 거슬러올라간다.
그 런 점에서 본다면 장소성의 상실은 예술, 특히 지역을 기반으로 예술과 예술인들에게 중요한 주제 였다.
그것은 보편의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상정하는 근대적 진보에 대한 명백한 문제제기이자,
보편과 특수를 명명하는 문화적 헤게모니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예술적 사유의 한 흐름이었다.
프랜차이즈화를 거부하는 지역의 서사
장소성의 상실을 예술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지는 오래되었다. 하지만 자본의 탐욕은 여전하 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본은 더욱 빠른 속도로 지역을 잠식한다. 저항은 계속되지만 자본의 철옹성은 무너질줄 모른다.
제주에서 경관 사유화의 사례로 언급되는 섭지코지의 경우, 최근까지도 개발 승인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 되고 있다.
1 이는 자본이 본질적으로 균질 한 질서를 강요하는 폭력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모든 것을 프랜차이즈화하는 자본의 폭력성 앞에서 지역의 기억은 또 다시 상실의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지역소멸은 단순히 인구의 감소만을 의미 하지 않는다. 지역의 소멸은 기억의 소멸이다.
그러기에 지역소멸의 대안을 균형발전이라는 발전주의적 해법에 기대어서는 곤란하다.
‘균형발전’은 지역을 또 다른 서울로 만드는 식민성의 이식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지역에 드리운 상실의 위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이 몰락의 내일로 향하고 있음에도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분명한 것은 하나다.
쾌도난마의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발터 벤야민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그 길의 영향력을 경험한다”고 말한 바 있다.
2 그것은 길을 걷는 자가 길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식하는 패배의 고백이 아니다.
길을 걷는 행위가 길의 힘을 만들어 낸다는 ‘생성’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이다.
길을 걸어갈 때야 비로소 길은 막힘에서 열림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은 길이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걸음이 길을 만드는 주체적 실천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모든 가능성이 온통 폐허의 자리가 되는 순간에도 우리는 끝내 걸어가야 한다.
해답은 걸어가는 과정의 진실 앞에서야 비로소 그 문을 열어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걸음으로 우리의 길을 만들어야 할까.
오늘의 몰락이 내일의 폐허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해답은 난망하지만 우리는 질문을 멈출 수 없다.
벤야민의 말을 조금 비틀어 말하자면 질문을 던지는 자만이 질문의 영향력을 비로소 실감하기 때문이다.
자본은 울퉁불퉁한 대지를 평평하게 만들어 버린다. 매끈하고 세련된 프랜차이즈의 세계가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으로 그것을 거부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지역이 지역일 수 있는 이유는 기억을 품은 장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많은 장소‘들’을 기억의 숲으로 바꾸기 위한 안간힘.
오늘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땅 위의 삶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자본의 이식에 맞선 기억의식목이 지금 우리에게 남은 저항이 아닐까.
그리고 그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본의 서사를 지역의 서사로 바꾸는 서사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프랜차이즈화에 맞선 지역 서사의 발견이라고 말할 때 예술의 자리는 지역의 대지에 개입할 수 있다.
누군가는 예술이 예술로서 존재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의 순수성을 이야기하는 자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사람이다’라는
조지 오웰의 지적처럼 예술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개입이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알베르토 망겔은
“작가의 재주는 우리 인간의 조건을 인정하기 위하여 이야기를 꾸며내려는 병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 바 있다.
3 “이야기를 꾸며내려는 병적인 충동”이란 달리 말하면 예술가들은
인간의 실존적 고민을 서사적 방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자, 서사가 예술 행위의 근본이라는 지적이다.
그렇기에 지역에서 예술 행위를 하는 이들이야말로 지역의 서사를 예술적 방식으로 해석하는 기억의 필경사가 될 수밖에 없다.
이야기가 힘이다. 멕시코 원주민 저항 운동세력이었던 사파티스타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말해듯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가 될 것이다. 지역의 서사는 서울의 언어가 아니라 지역의 언어로 말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지역의 서사는 장소에 깃든 기억을 지역의 신체에 각인한다. 평평하고 매끈한 자본의 세계가 아니라
울퉁불퉁하고 거친 지역의 세계를 오늘의 자리에 기입하는 힘. 그것은 결국 서사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술이 더 많은 지역의 서사를 지향할 때 그것은 폐허의 오늘을 창조의 내일로 바꾸는 하나의 실천이 될 것이다.
기억이라는 오래된 오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토니 모리슨은 그의 대표작 『빌러비드』에서 흑인 노예의 참혹한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124번지’라는 구체적 장소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 소설의 첫 시작은 이렇게 시작된다.
“124번지는 한이 서린 곳이었다. 갓난아이의 독기가 집안 가득 가득했다.” ‘한이 서린 곳’은 백인의 역사가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시공간이자,
백인의 언어로는 말해질 수 없는 서사가 탄생 하는 장소이다.
그렇기에 토니 모리슨은 ‘124번지’를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
삶과 문화 겨울호(제84호)는 재단 홈페이지, 제주문화포털 제주인놀다 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제주문화예술재단, 예술공간 이아, 산지천갤러리 방문 시 무료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
" 장소의 상실과 예술의 기억 "
글 김동현(문학평론가)
장소, 기억의 대지
장소는 기억이다. 사람은 장소에 깃들고 장소는 몸에 스민다. 시간의 지층에 새겨진 무늬가 기억 이라면 장소는 그 무늬를 품는다.
그러기에 장소가 사라지면 기억이 사라지고, 사람의 자리가 허물 어진다. 그것은 생성을 잃어버린 폐허다. 삶을 품지 못하는 불모의 대지다.
장소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장소는 인간의 삶이 탄생하는 토대이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향기를 맡으며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보여주듯 기억은 장소를 통해 공유된다.
문학이 시간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때 장소성은 중요한 테마로 등장하곤 한다.
현기영의 『제주도우다』가 제주 4·3항쟁의 기억을 말할 때 조천의 장소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나
김숨의『잃어버린 사람』이 부산 영도를 배경으로 해방기의 하루를 재현하고 있는 것은
장소성이 기억의 문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술은 장소의 필경사를 스스로 자처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문학, 나아가 예술이 장소성을 바탕으로 시간을 사유할 때 그것은 상실에 대해 예민한 촉수를 들이댈 수밖에 없다.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생태학자 아르투로 에스코바르가 근대성과 식민성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신자유주의 이후의 세계화를 유럽 중심이라는 로컬의 세계화로 규정하면서 세계화가 보편의 이름으로 장소를 지워가는
식민화의 과정이라고 지적한 것은 그런 점에서 주목 할 만하다. 제주 4·3항쟁의 문제에 천착해오던
현기영이 1992년 ‘토착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 혀간다’(「목마른 신들」)라고 말한 것을 떠올려보자.
현기영의 이런 진술은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었다. 이즈음 제주는 제주도개발특별법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 다.
연일 특별법 반대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탑동 매립 반대 운동 등 국가와 자본에 의한 개발의 폭력성이
제주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높아지던 시기였다. 그야말로 “토착의 뿌리”가 위태로웠던 시기,
그것을 현기영은 반자본, 반개발이 아니라 제주 정체성의 위기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체성이 주체에 대한 자기 인식이라고 할 때
그것은 기억의 문제와 필연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자본에 의한 개발과 그에 따른 지리적 재편성을 현기영은 초원지대가 죽음의 카페트가 깔린 골프장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은 초원의 기억이 자본의 기억으로 변질되는 장소성의 상실에 대한 예리한 지적이기도 했다.
이처럼 장소성의 상실은 아스팔트로 상징되는 개발주의 에의한 기억의 파괴이자, 지역의 시간을 서울의 시간으로 뒤덮는 망각의 은폐로 인식 되었다.
장소성의 상실을 하나의 위기로 받아들였던 것은 현기영뿐만 아니었다. 1988년 발표된 김석희의 『땅울림』 역시 이를 순결성의 훼손으로 인식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제주에서는 외지인 토지 소유 문제가 대두되었고, 김석희는 소설 속에서 그것을
“외지인의 침식을 피해 제주도적인 순결로 남아있는게 과연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이러한 문학적 사유는 80년대 제주민중 예술운동의 선두자였던 극단 수눌음이 창단 작품으로 ‘땅풀이’를 공연한 때로 거슬러올라간다.
그 런 점에서 본다면 장소성의 상실은 예술, 특히 지역을 기반으로 예술과 예술인들에게 중요한 주제 였다.
그것은 보편의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상정하는 근대적 진보에 대한 명백한 문제제기이자,
보편과 특수를 명명하는 문화적 헤게모니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예술적 사유의 한 흐름이었다.
프랜차이즈화를 거부하는 지역의 서사
장소성의 상실을 예술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지는 오래되었다. 하지만 자본의 탐욕은 여전하 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본은 더욱 빠른 속도로 지역을 잠식한다. 저항은 계속되지만 자본의 철옹성은 무너질줄 모른다.
제주에서 경관 사유화의 사례로 언급되는 섭지코지의 경우, 최근까지도 개발 승인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 되고 있다.
1 이는 자본이 본질적으로 균질 한 질서를 강요하는 폭력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모든 것을 프랜차이즈화하는 자본의 폭력성 앞에서 지역의 기억은 또 다시 상실의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지역소멸은 단순히 인구의 감소만을 의미 하지 않는다. 지역의 소멸은 기억의 소멸이다.
그러기에 지역소멸의 대안을 균형발전이라는 발전주의적 해법에 기대어서는 곤란하다.
‘균형발전’은 지역을 또 다른 서울로 만드는 식민성의 이식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지역에 드리운 상실의 위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이 몰락의 내일로 향하고 있음에도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분명한 것은 하나다.
쾌도난마의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발터 벤야민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그 길의 영향력을 경험한다”고 말한 바 있다.
2 그것은 길을 걷는 자가 길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식하는 패배의 고백이 아니다.
길을 걷는 행위가 길의 힘을 만들어 낸다는 ‘생성’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이다.
길을 걸어갈 때야 비로소 길은 막힘에서 열림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은 길이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걸음이 길을 만드는 주체적 실천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모든 가능성이 온통 폐허의 자리가 되는 순간에도 우리는 끝내 걸어가야 한다.
해답은 걸어가는 과정의 진실 앞에서야 비로소 그 문을 열어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걸음으로 우리의 길을 만들어야 할까.
오늘의 몰락이 내일의 폐허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해답은 난망하지만 우리는 질문을 멈출 수 없다.
벤야민의 말을 조금 비틀어 말하자면 질문을 던지는 자만이 질문의 영향력을 비로소 실감하기 때문이다.
자본은 울퉁불퉁한 대지를 평평하게 만들어 버린다. 매끈하고 세련된 프랜차이즈의 세계가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으로 그것을 거부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지역이 지역일 수 있는 이유는 기억을 품은 장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많은 장소‘들’을 기억의 숲으로 바꾸기 위한 안간힘.
오늘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땅 위의 삶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자본의 이식에 맞선 기억의식목이 지금 우리에게 남은 저항이 아닐까.
그리고 그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본의 서사를 지역의 서사로 바꾸는 서사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프랜차이즈화에 맞선 지역 서사의 발견이라고 말할 때 예술의 자리는 지역의 대지에 개입할 수 있다.
누군가는 예술이 예술로서 존재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의 순수성을 이야기하는 자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사람이다’라는
조지 오웰의 지적처럼 예술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개입이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알베르토 망겔은
“작가의 재주는 우리 인간의 조건을 인정하기 위하여 이야기를 꾸며내려는 병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 바 있다.
3 “이야기를 꾸며내려는 병적인 충동”이란 달리 말하면 예술가들은
인간의 실존적 고민을 서사적 방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자, 서사가 예술 행위의 근본이라는 지적이다.
그렇기에 지역에서 예술 행위를 하는 이들이야말로 지역의 서사를 예술적 방식으로 해석하는 기억의 필경사가 될 수밖에 없다.
이야기가 힘이다. 멕시코 원주민 저항 운동세력이었던 사파티스타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말해듯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가 될 것이다. 지역의 서사는 서울의 언어가 아니라 지역의 언어로 말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지역의 서사는 장소에 깃든 기억을 지역의 신체에 각인한다. 평평하고 매끈한 자본의 세계가 아니라
울퉁불퉁하고 거친 지역의 세계를 오늘의 자리에 기입하는 힘. 그것은 결국 서사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술이 더 많은 지역의 서사를 지향할 때 그것은 폐허의 오늘을 창조의 내일로 바꾸는 하나의 실천이 될 것이다.
기억이라는 오래된 오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토니 모리슨은 그의 대표작 『빌러비드』에서 흑인 노예의 참혹한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124번지’라는 구체적 장소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 소설의 첫 시작은 이렇게 시작된다.
“124번지는 한이 서린 곳이었다. 갓난아이의 독기가 집안 가득 가득했다.” ‘한이 서린 곳’은 백인의 역사가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시공간이자,
백인의 언어로는 말해질 수 없는 서사가 탄생 하는 장소이다.
그렇기에 토니 모리슨은 ‘124번지’를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